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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철학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리뷰]

by 빠뜨루 2023.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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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리뷰]

<소개>

니체 사상을 조금 쉽게 해설한 책

 

<줄거리>

니체의 저서와 다른 책에서 나온 내용들을 인용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한 번 정도 언급한 단어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열역학 제1법칙인 '에너지 보존 법칙'을 본 니체는 우주 공간은 유한하고 시간은 무한하며, 그 공간에서 에너지는 순환하는 것이기에 모든 것은 영원히 회귀한다고 생각했다. 그 에너지의 방향은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능적 쾌락, 지배욕, 그리고 자기집착과 같은 생명의 원동력이자 존재의 근원인 힘에의 의지 결정된다.

 

우리 인간은 신체와 영혼이 성장함으로써 즐거움을 느낀다. 성장해 커지려는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오늘의 인간을 뛰어넘어 새로운 인간, 곧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위버멘쉬란 자신을 극복한, 그러면서 계속 극복해가는 인간을 말한다.

 

세상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목적으로 인해 전쟁과 폭력과 같은 충돌이 멈추지 않는다. 이를 막고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이 위버멘쉬가 되는 것이기에 모든 인간이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러한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선 정신의 세 단계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한 길은 낙타 단계의 정신에서 사자 단계의 정신을 거쳐 아이 단계의 정신에 이르는 것이다.

 

먼저 낙타 단계의 정신은 외부 권위와 명령에 복종해 자신의 것이 아닌 삶을 사는 의존적 인간이다. 여기서 주체적인 자신의 삶을 살게 되면 사자가 된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을 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가 정확하지 않아 방황을 하며 자유를 감당하지 못해 다시 낙타로 돌아가려고 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한다.

 

위버멘쉬에 이르는 길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독한 길이다. 그러나 고독은 어머니의 품처럼 친숙하며 안온하다. 고독 속에서는 마음에 있는 것을 모두 다 털어놓아도 된다. 타향에 있듯이 전전긍긍할 것도 경계할 것도 없다.

 

이렇게 어려움을 극복하여 아이가 되면 복종해야할 권위도 외부에 두지 않는다. 그저 순수하고 정직하며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 있다. 그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시작할 뿐이다. 이러한 아이단계의 정신 상태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자기긍정에서 나온다.

 

같은 삶을 끝없이 반복하는 영원 회귀는 나쁘게 말하면 바뀔 수 없는 미래가 계속 반복된다는 뜻이기에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허무의 감정으로 내몬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니체의 해법은 이것을 우리의 운명으로 받아들여 사랑함으로써 적극적으로 그 굴레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용기는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이라고 말함으로써 죽음조차 뛰어넘는다. 영원한 회귀를 받아들임으로써 생사의 경지를 뛰어넘는 것이다. 이러한 영원회귀에 따르면 계속 끝없이 되돌아올 생명이기에 죽든 살든 서두를 필요가 없어진다.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그랬었다'라는 우연을 '나 그렇게 되기를 원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기를 바랄 것'이라는 희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어떤 순간이 다시 오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순간이 다시 오기를, 곧 만물이 영원히 회귀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부터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우리의 목표는 세상과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요 내용>

미래는 자신의 왜소한 현실에 대한 경멸에서 위대한 것을 찾아 모험하는 사람에게 있다.

 

인간은 자연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는 창조물이지만 자신을 창조해나간다는 점에서 창조주다.

 

잠을 잘 자려면 낮 동안 해야 할 일을 다 해놓아야 한다. 일에서 오는 적당한 피로와 성취감에서 오는 마음의 평화가 잠을 재촉하는 양귀비가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마음의 갈등이 없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높이 오르는 자는 위를 올려다본다. 반대로 이미 높이 올라와 있는 자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나무가 위로 쑥쑥 성장하려면 그만큼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하는 것처럼 인간 또한 인식의 정상을 향해 오르려면 그만큼 어두운 땅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얻으려면 온갖 더러운 것들을 뚫고 그 바닥까지 내려가보아야 한다.

 

바닥까지 내려가 만물의 운행 이치에 눈을 뜰 때, 그때 비로소 정상에 이르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창조자의 길을 가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한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경멸할 줄 안다. 그래서 창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을 경멸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야 할 이유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보물은 밖에 있지 않고 자신의 자기에게 있다.

 

악행은 악행으로 응수해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돕겠다고 나서는 대신 자신의 기쁘고 의연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 고뇌하는 사람들에게 더 힘과 격려가 된다.

 

언제 우리가 이타심을 발휘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이타심을 발휘하는 당사자에게 이득이 될 때다. 이득은 명예일 수도 있고, 인간적 도리를 다했다는 자기만족일 수도 있다. 책임의 모면일 수 있으며, 베풀 수 있는 우월한 지위에 대한 확인일 수도 있다. 자기연민의 발로일 수도 있다. 그 같은 이득에서 발휘하는 것이 이타심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자기집착 곧 이기심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닌가?

 

아래 잡것들은 잡것의 삶을 살면 된다. 손을 쓸 수 없는 자들이니 어쩔 수 없다.

 

비판적일 필요가 있다. 모든 일에 한 번쯤은 불신해 보는 것이다. 그런 불신이 건전한 불신이다.

 

<후기>

힘에의 의지, 위버멘쉬는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은데, 무한히 같은 인생이 반복된다는 영원회귀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지금의 인생은 과거에 내가 지나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뜻이고 어찌 보면 이미 미래가 정해져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결국 정해져있는 인생이니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가 사라지고 허무주의에 빠져드는 게 아닌가. 여기에 니체는 그저 받아들이라고 답한다.

 

어느 정도 삶을 살아가고 성취를 느낀 사람들이라면 영원회귀를 받아들이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생명을 잃거나 평생을 노예처럼 살아가며 고통 속에서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계속 반복되는 삶을 살아라고 한다면 그건 지옥과 다름없을 것이다. 과연 그러한 삶은 사람들은 계속되는 고통과 같은 삶을 살아가며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오히려 니체가 반대하던 배후세계라도 믿어야 약간의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 든다.

 

니체가 알고 있던 우주와 달리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다. 유한한 공간이 아닌 것이다. 유한한 공간에서 순환한다는 영원 회귀는 불가능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순환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것이라고 본다. 나는 인생이 계속 반복되지 않고 한 번뿐이라도 그 자체로도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뿐이고 정해져 있지 않는 미래이기 때문에 더욱더 자기실현, 자기극복을 통한 위버멘쉬를 꿈꾸며 삶을 살아가는 것을 추구하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저번에 읽었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읽고 나서 이해를 하지 못한 부분과 오인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던 책이었다. 완독하는 데 2주가 걸렸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하루 종일 니체 사상에 대해서 되새김질했었다. 그래도 머릿속으로 정리가 되지 않았고 리뷰를 쓰려고 하니 손에 잡히지도 않아 이 리뷰를 적는데만 또 2주가 더 걸렸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의 니체 사상에 대한 대략적인 틀을 잡을 수 있게 된 것 같아 만족한다.

 

<추천>

생각보다 어렵긴 해도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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