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칸트인가 [리뷰]
<소개>
도덕적 인간이 되자
<줄거리>
[순수이성비판]
우리의 마음은 감성, 상상, 지성, 이성 등의 4가지 부분으로 나뉜다. 감성이 자극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능력(직관)이며 지성은 감성을 통해 주어진 잡다한 내용을 종합하는 능력(판단)이다. 그리고 상상력은 그 둘을 연결하여 도식화시키는 능력이다. 마지막으로 이성은 생산된 지식을 체계화 시키는 것이다.
인식이란 선험적 종합판단이라 부른다. 선험적 종합판단이란 이미 알고 있는 내용과 경험을 통해 얻은 내용을 확장하여 새로운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사유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세 가지 물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의해 형이상학은 신학에서 해방되고, 의식이 시간은 자연의 운동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실천이성비판]
고대 윤리학에서 도덕법칙은 선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칸트는 먼저 규칙을 정하고 부합하면 ‘선하다’라고 어긋나면 ’나쁘다‘고 정했다. 그러한 규칙은 실천적 자유에 기원을 둘 때만 인정된다.
칸트 윤리학은 예지계(이념의 세계)에서 일어난다. 의지는 도덕적 판단의 주체이며 존경은 도덕적 판단의 원동력이고 자율은 책임과 의무가 함께하는 적극적 의미의 자유라고 보았다.
정언명법은 원칙이 보편성과 필연성을 뛸 때 타당성을 얻기에 개인에 준칙에 대해 형식적 조건을 갖추도록 명령하는 법칙이다. 즉, 내가 정한 원칙이 남에게도 통하는 법칙인지 따져보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존경이라는 동기에서 나온 행위만을 도덕적 행위로 인정했다. 결과에서 도덕법칙과 일치하는 행동은 합법적일지는 몰라도 도덕적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고의 선은 도덕성과 행복을 동시에 성취할 때 얻을 수 있다. 그러한 최고의 선을 추구하는 실천 이성을 위해선 영혼 불멸, 자유, 신을 필요로 했다.
[판단력비판 - 전반]
쾌-불쾌를 구분하는 능력은 판단력이 좌우한다. 판단력은 이미 있는 보편자를 이용하는 규정적 판단력과 새로운 보편자를 모색하는 반성적 판단력으로 구분된다. 무규정의 상태에 있던 대상이 규정 가능한 것으로 변하는 순간에 규정적 판단은 쾌감을 분비한다.
예술의 세계에는 ‘예술가’, ‘작품’, ‘감상자’가 있다. 예술가는 무의식적으로 작품을 제작해야 하며 작품은 감성적 이념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감성적 이념이란 영감을 일으키거나 독창을 자극하는 원리다. 그리고 감상자는 취미 판단으로 아름다운 것을 인식한다. 취미 판단은 내면의 인식능력 간의 자유로운 유희에서 비롯된다. 그런 생기 상태에서 즐거운 감정이 분비된다.
칸트는 취미 판단의 4가지 계기를 질, 양, 관계, 양태로 구분하고 그 메커니즘을 분석했다. 질적인 특징은 관심 없는 것에도 인식능력들이 최고조로 활성화되어 만족하는 것이라 보았다. 관계적인 특징은 조화로운 통일을 이루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 상태를 말한다.
만인이 동일한 구조의 마음을 공유하기에 심미적 쾌감은 보편적일 수 있다. 그러나 아닐 수 있기 때문에 타인의 관점으로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한다.
취미 판단 외에 숭고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숭고는 엄청난 크기나 가공할 만한 힘 등으로 고통과 불쾌의 감정을 통해 유발된다. 이러한 자연의 숭고는 우리 내면에도 가공할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우리가 도덕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근거가 된다.
[판단력비판 - 후반]
17~18세기에 모든 생명체와 자연은 정교하게 움직이는 기계와 같다는 기계론적 자연관이 주를 이루었다. 여기서 칸트는 생명체가 목적에 따라 형성된 것이라 보는 유기체론을 더한다.
나무와 같은 생명체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형성해가는 능력을 가진 반면 시계와 같은 인공물은 목적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차이가 있다.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문화와 윤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의 질서를 넘어서는 설계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 주체로 인간이 향하는 최상의 목적은 도덕적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러한 최고선으로 가기 위해선 신이 요청된다고 한다.
<주요 내용>
나는 광대무변한 우주 앞에서는 한없는 유한성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내 안에 있는 도덕법칙을 생각할 때면 허무한 감정에서 벗어나 인류 전체에 부과된 초-감성적 사명에 부름을 듣는다. 저 우주만큼 커다랗고 숭고한 소명의식 속에서 전율하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내 안의 도덕법칙은 자유를 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유가 나를 자연적 사물과 구별되는 인격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나를 정신적으로 품위 있게 해주는 것, 신성불가침의 고귀한 인격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자유다. 도덕법칙은 내 안의 자유를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증거다. 자유는 나를 한없는 높이의 소명의식으로 고양해 광대무변한 우주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인류 전체와 함께 이룩할 도덕적 사명에 헌신할 용기를 준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결국 마음을 해부하여 이론적, 실천적, 예술적 보편성이 어떻게 서로 다른 조건에 근거하며 따라서 어떻게 서로 다른 타당성 범위를 거느리는지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후기>
칸트와 니체는 회의론을 어떻게 타파하는가에 대해 고민을 하였고 각자 내놓은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 칸트는 도덕적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고 니체는 위버맨쉬를 꿈꾸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의 삶의 방식은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스스로 성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 것 같았다. 삶의 목적, 진리 등을 알아가다 보면 결국 삶이란 스스로 성장하는 것을 추구하며 실천해야 한다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세상에는 우리가 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 전두환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악한 행동을 하였지만 잘 먹고 잘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권선징악이란 창작물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 다는 나는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젠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우리 안에 도덕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도덕법칙은 우리가 이성적으로 만든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따른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나를 정신적으로 품위 있게 해주는 것, 신성불가침의 고귀한 인격으로 만들어주는 것이기에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마지막에 신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추천>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길 추천. 최대한 어렵지 않게 잘 쓰인 책인 것 같다. (그래도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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