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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역사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리뷰]

by 빠뜨루 2023.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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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리뷰]

<소개>

조선왕조실록 정리집

 

<줄거리>

[조선왕조실록 예비지식]

1. 조선왕조실록이란?

태종부터 철종까지 기록이다. 1800여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복사본을 만들어 관리하였다.

2. 묘호와 시호, 존호란?

묘호란 죽은 임금을 부르는 이름이다. 조와 종으로 끝나는 호칭 방식은 중국의 방식을 따른 것이다. 세종대왕의 정식 명칭은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이다.

시호란 왕이나 신하가 죽은 왕 또는 신하에게 올리는 이름이다.

존호란 신하들이 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올리는 이름이다.

조선의 모든 왕은 다 '대왕'으로 불렸다.

3. 조와 종은 어떻게 구분될까?

조를 붙이는 이유 : 나라를 세운 경우, 나라를 발전시킨 경우, 반란에 성공한 경우

4. 왕위는 누구에게 계승되는가?

장자가 계승하도록 되어있으나 27명의 왕 중 장자는 7명뿐이다.

5. 왕이 하는 일은?

왕의 한 해는 그야말로 제사로 시작해 제사로 끝났다.

6. 왕비는 어떻게 뽑을까?

금혼령이 내려진 후 선별된 처녀 중 간택하는 방식이었다.

7. 왕비가 하는 일은?

세자를 낳는 것, 내외의 작위를 가진 여성들을 관리하는 일, 섭정역할

8. 왕비의 옷

황후 : 노란색, 왕비 : 붉은색, 후궁: 보라색, 공주, 양반가의 여인 : 초록색

 

[태조실록]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의 뒤를 이어 북방을 지키는 일을 했다. 명나라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자 고려는 이성계를 파병한다. 그러나 요동 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최영을 제거하고 공민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왕위에 올린다. 얼마 안 가 공양왕을 내친 후 모든 왕족을 몰살시키고 국왕으로 등극한다. 개성은 땅의 기운이 다했다는 이유로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유교를 숭배하도록 정책을 펼쳤다.

'조선' 과 '화령' 이 국호 후보였다. 당나라에게 결정을 부탁했고 당나라는 중국의 제후국이라는 의미로 조선을 선택했다. 조선 측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도로 받아들였다.

정몽주를 죽인 이유는 정도전을 유배에서 풀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역성혁명론에 입각해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을 개국하게 했다.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정치체제로 만들려 했다. 이를 알아챈 이방원에게 세자 방석과 함께 살해당한다.

과전법은 전국 토지의 대부분을 국가의 수조지로 편성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경제를 안정시키고 체계를 잡는데 성공한다. 과거제를 이용해 신분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려 했으나 집권층에 의해 고착화가 되고 양반, 중인, 평민, 노비로 사분법적 신분 구조를 이루게 된다.

 

[정종실록]

태조는 둘째 부인 강 씨를 총애하여 장남 방우가 아닌 열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여기에 정도전의 사병 해체를 주장하자 세자 책봉에 불만을 가지던 왕자들은 이방원을 중심으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습격해 살해한다. 둘째 방과가 왕위에 올라 정종이 된다. 실세는 이방원이 가지고 있었기에 세자로 책봉하고 일찍이 상왕으로 물러난다.

 

[태종실록]

방간과 박포가 사병을 동원하여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지만 패배한다. 이로 인해 모든 권력이 이방원에게 집중되고 왕권 강황에 큰 도움이 된다.

1402년 이성계의 복위를 도모한 조사의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거북선 개발과 신문고 설치를 하였으며 고려의 부정부패의 원인이 불교에 있다고 생각한 신진사대부들의 주장에 따라 억불 정책을 펼치고 성리학을 발달시켰다.

물품화폐가 상거래 수단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재정 조달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화폐개혁을 통해 저화라는 화폐를 이용하도록 하였으나 실패한다.

 

[세종실록]

양녕대군이 세자였으나 태종의 불신으로 폐위된다. 그로 인해 셋째 아들인 충녕이 왕세자로 책봉되고 세종이 된다. 과학에 대한 지원으로 해시계, 물시계와 더불어 측우기도 발명되었다.

세종은 정부구조를 의정부서사제로 바꾸고 세자에게 서무 결재권을 넘겨 업무량을 줄여가며 직접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몰두했다. 6여 년간 작업하여 창제를 한다. ("임금이 친히 언문 28글자를 만들었다"라고 실록은 쓰고 있다) 관리 시험에도 훈민정음을 포함하고 기관에 훈민정음으로 글을 내리는 등 훈민정음을 전파하였고 모든 백성에게 퍼졌다.

내정은 황희와 맹사성, 과학은 장영실, 음악은 박연이 맡아 일을 하였다. 집현전의 학자인 정초는 풍토에 따라 다른 농사법을 기술한 농사직설을 집필한다. 이종무는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침략을 막았고 김종서가 육진을 개척하여 북계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문종실록]

세종의 건강 문제로 섭정을 했다. 유연한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재위 2년 4개월 만에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단종실록]

단종은 12세에 수렴청정조차도 받을 수 없는 처지로 즉위한다. 대신들은 황표정사를 통해 조정을 장악하였기에 왕권은 약해졌다. 이를 틈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낸 후 왕이 된다. 이후 두 번의 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났지만 실패하고 단종은 사사되었다.

단종 복위 사건을 주도한 인물들을 '사육신'으로 추앙했으며, 벼슬을 하지 않고 절의를 지킨 사람들을 '생육신'으로 높여 불렀다.

 

[세조실록]

왕조 일대의 총체적 법전인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하고 왕자와 왕이 지명한 신하들이 국정을 결정하는 원상제를 도입하여 왕권 강화에 힘썼다. 즉위 기간 동안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악몽을 꾸거나 병을 앓기도 했다고 한다.

세조 시대를 이끌었던 인물로 무력의 권람, 책사의 한명회, 정사엔 신숙주가 있었다.

 

[예종실록]

세자였던 형이 일찍 죽어 둘째 아들로 태어난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건강상의 문제로 15개월의 치세를 이루다 죽는다.

'남이의 역모 사건'이라고 남이라는 인물이 역모를 꾸미려 하는 것을 발견하고 이에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거나 유배시킨 사건이 있었다.

 

[성종실록]

정희황후는 한명회와 결탁하여 예종의 아들이 아닌 세조의 손자 자을산군이 뒤를 잇게 하였다. 대비 윤씨는 섭정을 하였고 유교 문화 강화, 민생 안정책을 펼쳤다.

수렴청정이 끝나자 도학정치에 입각하여 학문 연구에 후원을 많이 하였고 많은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든 기초를 완성시켰다는 뜻의 성종이라는 묘호를 얻었을 만큼 조선 개국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어갔다. 그러나 태평성대는 퇴폐풍조를 낳았고 성종도 유흥에 빠진다. 이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폐비가 되고 사약을 받고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시기 조선의 기본 법전 '경국대전'을 완성시켜 법치주의에 입각한 왕조를 만들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동궁여지승람, 동문선, 동국통감 등 역사, 문학 서적도 편찬되었다.

 

[연산군 일기]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긴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성종의 아들이기에 세자로 책봉된다. 무오사화를 통해 사림 세력을 없애고 조정을 독점한다. 그리고 흥청망청 놀면서 국고를 거덜 냈고 백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데 이른다.

세조를 따르던 훈구 세력과 동학을 중시하는 사림 세력의 대립이 있었다. 무오년에 김종직 문하의 세조를 비방한 글이 발견된다. 그로 인해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하고 사림 세력이 화를 입는 무오사화가 일어난다.

감추어져있던 폐비 윤씨 사건이 임사홍에 의해 들추어지자 연산군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죽였다. 그것이 갑자사화이다.

 

[중종실록]

연산군의 폭정에 성희안과 박원종이 중심이 된 중종반정을 일으켜 성공시킨다. 이후 조광조라는 인물이 사림세력을 중심으로 개혁을 일으키려 하나 국정을 어지럽힌다는 훈구파의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숙청당한다. 이를 기묘사화라고 한다.

 

[인종실록]

계모 문정왕후 윤씨의 시기심 속에 살다 30살에 재위하여 1년도 못 채우고 생을 마감한다.

 

[명종실록]

명종은 즉위하고 문정황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문정황후의 친동생인 윤원형이 윤임 세력을 제거하는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외척의 일파가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쁜 관료들로 인해 임꺽정과 같은 의적이 나타나기도 했다. 조선 혼란의 원흉인 문정황후가 죽자 사회도 점차 안정되어갔지만 명종도 2년 뒤에 세상을 떠난다.

 

[선조실록]

명종이 죽고 그를 이을 적손이 없자 방계에서 찾게 되었고 선조가 왕으로 선택 된다. 이황, 동인 / 이이, 서인으로 분리된 붕당정치체제가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20일 만에 한양을 내주고 선조는 의주성에 피난(의주 파천)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전쟁은 끝난다. 조선은 국방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은 포로로 잡아간 기술자들로부터 도공, 활자, 성리학을 배우게 된다.

이 시기 명장으로 이순신, 곽재우가 있으며 석학들로는 인본주의자 율곡 이이, 시인 정철이 있었다.

 

[광해군 일기]

전란 중에 서자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다. 대북파와 함께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패륜 행위를 일삼음으로써 오히려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대동법을 실시하여 세금 구조를 일원화 시켜 세무 부담을 줄이고 농지를 실측하여 경작지를 확장하는 등 민생안정 정책에 힘을 썼으며 망해가던 중국과의 관계를 청산하여 대등한 위치로 격상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는 등 실리적인 정책을 펼쳤지만 인조반정 세력에 의해 폐위된다.

이 시기에 홍길동을 쓴 허균은 신분 체제를 없애기 위해 혁명을 꿈꾸었지만 발각되어 능지처참 당하고 만다. 그리고 동의보감을 쓴 허준이 있었다.

 

[인조실록]

능양군은 정계에서 내몰렸던 서인과 함께 대명 사대주의를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켜 성공한다.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웠지만 대우를 받지 못한 이괄이 불만을 가지고 난을 일으킨다. 이괄의 난으로 인해 조선은 국방이 약해진다.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불리는 청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어 명나라와 연을 끊고 청나라에 복속된다. 상평통보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효종실록]

인조의 두 아들은 당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청나라에 볼모에 잡혀있게 된다. 반청 감정을 가진 인조는 청나라에 우호적인 첫째 아들을 제거한다. 대신 반청 감정을 가진 둘째 봉림대군을 세자에 앉힌다. 군사력 강화에 힘을 썼으며 나선(러시아) 정벌을 하기도 했다.

 

[현종실록]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로 효종이 죽자 즉위한다. 내외적으로 안정적이었지만 남인과 서인의 예론 전쟁 속에 있었다.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 서인은 1년상, 남인은 3년상을 치러야 한다는 논쟁이였다. 이는 정권 주도권 싸움이기도 했지만 현종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였다. 효종은 남인의 손을 들어주며 끝이 난다.

하멜표류기가 유럽에 알려지는 시기였다.

 

[숙종실록]

숙종은 현종의 외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바로 친정을 시작했다.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군주에 대한 충성을 유발했고 왕권을 강화했다. 일본과 울릉도 귀속 문제도 해결한다.

후궁인 장희빈은 왕비에 오르기까지 했지만 이전 왕비가 죽기를 기원한 것이 발각되어 죽게 된다. 이 사건을 무고의 옥이라고 한다.

기사환국은 남인이 정권을 잡은 사건, 갑술환국은 서인이 집권하는 사건을 말한다.

이 시대에 장길산이라는 의적이 있었는데 끝까지 잡히지 않았던 유일한 의적이었다.

 

[경종실록]

어머니 희빈 장씨가 하초(영 좋지 않은 곳)을 잡아당겨 고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병세로 인해 4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으로 후사를 얻지 못하고 죽는다.

 

[영조실록]

숙종의 둘째 아들로 이복형 경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다. 붕당을 골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펼쳤지만 각 당파들은 정권을 잡고 싶어 했다. 그로 인해 장헌세자(사도세자) 사건이 일어난다. 아들에겐 엄했지만 백성들에겐 온화한 정책을 펼치다가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이인좌의 난은 소론 세력이 역모를 꾸몄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왕권이 강화된 사건이다.

서얼이 인구의 절반이 넘자 차별을 없애는 서치법을 만들었다.

 

[정조실록]

사도세자의 아들로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의 복수를 감행하고 규장각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친위 세력을 늘렸다. 기존의 사대주의 사상이 아닌 민족주의 사상을 도입하여 문예 부흥기를 이끌었다.

이 시기 허생전을 쓴 박지원, 목민심서를 쓴 정약용 그리고 유학파 박제가가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 노비가 도망치는 사태가 급증하며 노비의 수가 줄어들었다. 그로 인해 노비 추쇄 사업을 실시하기도 했다.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신분제도가 완전히 폐지된다)

 

[순조실록]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계모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유교 윤리를 해한다는 이유와 벽파의 반대파인 남인들을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청교도를 탄압했다. 전염병이 도는 등 천재지변이 많았다.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 일문이 세력이 잡았고 독단으로 정권을 휘두르는 세도정권이 성립되었다. 그로 인해 사회는 부패하고 거기에 맞선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헌종실록]

순조의 손자로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수렴청정을 받으며 정치를 시작했다. 이 시기 양민에서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는 일이 빈번했다.

 

[철종실록]

현종의 후사가 없어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7촌 철종이 왕이 된다. 안동 김씨의 세력에 대항할 힘이 없자 술과 여색에 빠져 살다 서른셋의 나이로 일찍 죽는다.

부정부패는 더 심해져 갔고 전국에선 민란이 일어났다. 인본주의적인 동학이라는 종교가 최제우에 의해 창시되었고 조선 말기에 큰 영향을 끼치는 민족종교가 된다.

 

[고종실록]

철종이 죽자 흥성대원군의 아들 명복을 양자로 삼아 뒤를 잇게 하였다. 수렴청정을 하면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도 펼쳤으나 무리한 정책과 쇄국정책을 펼처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천주교인을 학살한 병인박해, 프랑스의 침략인 병인양요, 미국의 침략전쟁인 신미양요를 겪는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하자 정권은 미씨 척족들이 장악했다. 일본과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맺는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국력이 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동학혁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청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일본도 개입하였고 민씨를 몰아내고 흥성대원군을 바지 사장으로 앉히는 갑오개혁을 단행한다.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승리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고종은 러시아에 도움을 청했지만 러일전쟁도 일본이 승리하면서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완용 등 친일 세력에 의해 퇴위하게 되고 이후 국상이 거행될 때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순종실록]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해 한다. 1910년 8월 29일 송병준, 이완용 등 친일파는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켜 조선왕조 27대 519년 역사는 막을 내린다.

 

<주요 내용>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려오기 때문에, 친영을 흔히 '장가간다'라고 표현한다.

 

여자는 7세에 성에 눈을 뜨고, 14세에 아이를 잉태할 능력을 가지게 되고, 21세에 성장이 완료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생겨난 말이 '남녀칠세 부동석'이다. 즉, 여자가 7세에 성에 눈을 뜨게 되므로 7세 때부터는 남녀를 함께 놀게 하거나 같은 방에서 재우지 않았다.

 

방원이 정종의 동생임에도 세자가 아닌 세자에 책봉된 것은 정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발상에서 기인했다. 형식적으론 방원이 정종의 세자로서 왕위를 이었지만, 실제론 태조의 세자로 왕위를 잇고자 했던 것이다.

 

태종은 왕권 행사에 저해 요소가 되는 외척 세력을 약화시킨 뒤, 자신이 일찍 상왕으로 물러앉아 왕이 성장할 때까지 왕권을 보호하고 왕이 정사를 제대로 처리할 능력이 생기면 권력의 마지막 보루인 군정의 안정에 주력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양반들은 사실 문자와 학문을 권력의 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평민이나 천민이나 쉽게 익힐 수 있는 훈민정음의 등장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한명회는 노년에 권좌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고 싶다 하여 정자를 짓고 여기에 자신의 호를 붙여 '압구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세자를 책봉하면 명나라에 보고를 해야 했으며, 명에서 고명이 내려와야 정식으로 세자로 확정되는 것이 상례였다.

 

양첩 소생은 서라 하고 천첩 소생은 얼이라 하였고, 이 둘을 합쳐 서얼이라 했던 것이다.

 

주인의 집에 기거하는 솔거노비, 주인과 따로 사는 외거노비가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첫 번째 형태의 노비가 많았으나 후기로 가면서 두 번째 형태의 노비가 많아진다.

 

<후기>

태종은 왕권에 엄청난 집착을 보였던 사람인 것 같다. 살아생전부터 해서 사후까지도 왕권만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세종 시기엔 뭐랄까 어벤저스 같은 든든한 팀원들이 갖춰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재위 기간이 짧은 왕이 많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정종은 이방원의 능력을 인정하고 일찍이 상왕으로 물러나 현실적으로 가장 행복한 결말을 찾아갔다고 보였다. 재위 기간 동안 큰 성과를 내진 못 했지만 자신의 분수를 알았다는 점에서 현명해 보였다.

 

붕당끼리 서로 오직 정권을 잡기 위해서만 싸우는 모습을 보인다. 이 모습은 현재의 정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였다. 정치적인 부분에서 500년 전에 비해 발전된 게 하나도 없다고 느껴지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시기마다 주요 사건이 일어나게 뒷배경도 같이 설명해 주는 부분과 세조나 광해에 대한 평가도 알려진 것과 달리 평가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은 좋았다.

 

너무나 내용이 많아서 정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중요하지 않는 인물의 이야기는 빼서 분량을 줄여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천>

분량이 많아 읽기 힘들지만 대략적인 조선시대의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으므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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