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인가 [리뷰]
소개
죽음에 관한 철학들을 물리주의자가 논리적으로 파헤치는 책
줄거리
1. 인간이란
죽음을 이야기하기 앞서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정신', '물질'이다.
1) 정신 -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에 바탕을 둔 관점이다.
2) 물질 - 인간이 그저 육체에 불과하다고 보는 물리주의 관점이다.
2. 영혼은 존재하는가
두 가지 관점 중 먼저 영혼이 존재하는지 알아보자. 영혼의 존재를 입증하는 방법에는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이 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X-ray가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엑스레이 사진이 그것을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추론하는 것이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 방식이다. 영혼도 우리가 직접 볼 수 없지만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고 이원론자들은 주장한다.
그중 하나로 이원론자들은 육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영혼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뇌가 컴퓨터와 같은 CPU라고 생각한다면 영혼이 없더라도 육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 처럼 육체가 움직이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이원론자들은 육체를 움직이는 방법 이외에도 '창조성', '자유의지'와 같은 명제로 영혼의 존재를 입증을 하려 했다.그러나 아직까지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에 따른 어떠한 주장도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하는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결론적으로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은 가설을 받아들이는 한 가지 접근방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가설은 가설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원론자들은 영혼이 있다는 것은 입증을 해야 한다. 반대로 물리주의자들은 영혼이 없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 유니콘이나 드래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굳이 입증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와 같다. 그저 존재한다는 주장에 반박만 하면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직까지 영혼의 존재 이유에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앞선 추론 방식과 더불어 영혼을 입증하기 위한 시도들은 모두 실패했다.
그렇다고 물리주의 관점이 무조건 맞다고 할 수 없다. 아직까지 '의식'과 같은 존재를 물리주의 관점에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 그 원리를 밝혀내지 못했다고,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렇기에 물리주의자 관점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합리적이다라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3. 영혼은 죽지 않을까
영혼의 존재에 대해 입증하지 못했지만 영혼이 존재한다고 가정을 해보자. 과연 영혼은 죽지 않을까? 이원론의 선구자인 플라톤은 '보이지 않으며 단순한 존재'들은 변화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과연 그럴까?
플라톤의 말처럼 종이, 육체, 연필 등 물체들은 복잡한 구성물은 분해되며 소멸된다. 그러나 라디오 전파와 같이 단순해도 보이지 않는 유형도 소멸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에 "영혼은 단순하며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는다"라는 정의는 틀렸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보이지 않으며 단순한 존재를 숫자와 같은 단순한 개념까지 확장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숫자와 같은 개념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은 소멸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영혼은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존재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영혼을 발견할 수 있다면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닌 셈이며, 소멸 불가능한 유형에 속하지 않게 된다. 결과적으로 여기까지 플라톤의 주장일 뿐이며, 영혼이 소멸 불가능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4. 나는 왜 내가 될 수 있는가
한 발짝 더 물러나 영혼이 죽지 않는다고도 가정해 보자. 그럼 그 영혼은 정확히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이 소유한 자동차가 한대 있다고 생각해 보자. 현재 존재하는 자동차가 20년 뒤에 자동차와 동일한 존재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헤드라이트나 핸들과 같은 부품이 아닌 주요 부품들이 20년 전과 동일하게 구성되어 있다면 동일한 자동차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현재의 구성 물질과 20년 후의 주요 구성물질이 크게 바뀌지 않으면 동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 죽음 이후엔 어떻게 동일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엔 3가지 관점이 있다.
1) 영혼 관점
인간의 정체성에서 핵심은 동일한 영혼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영혼이 같기에 죽어도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인간의 영혼을 모든 기억, 욕망, 생각이 동일한 다른 영혼으로 바꿔치기한다면 우리는 알아낼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의 영혼이 매일, 매분 매초 동일한 영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맹점을 가지고 있다.
2 ) 육체 관점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핵심은 동일한 육체라고 보는 관점이다. 그러나 육체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중요하지 않다. 육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뇌라고 본다. 뇌를 둘로 나누어 다른 몸에 이식을 한다면 어떤 육체가 본래 인간과 동일한 인물인지 알 수 없다는 맹점이 있다.
3) 인격 관점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핵심은 동일한 인격(믿음, 기억, 욕망 등)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사람의 인격은 시간이 지나며 변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억의 연속성이 이어진다면 동일한 인격이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인격 관점으로 보았을 때, 나와 동일한 인격을 가진 인물이 세상에 또 존재한다면, 어떤 인물이 진정한 나인지 알 수 없다는 맹점이 있다.
5. 나는 영혼인가 육체인가 인격인가
영혼 관점으로 보면 영혼의 존재를 밝히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영혼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리고 육체, 인격으로 보는 관점 또한 맹점을 가지고 있기에 육체나 인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선 꼭 어떤 관점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점은 '나'라는 존재는 정의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가 죽음 이후에도 존재할 것이라 말하는 것은 어렵다.
6. 죽음이란
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반적으로 물리주의자들의 시선에선 죽는다는 의미는 육체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그럼 육체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때, 즉 언제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앞선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따른 관점에 따라 죽음의 시점도 육체, 인지 기능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육체(B)가 멈추었을 때를 죽었다고 볼 수 있고, 인지 기능(P)이 멈추었을 때를 죽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기능이 동시에 멈춘다면 확실히 죽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두 가지 기능이 따로따로 멈춘다면 언제 죽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신체는 멈추었지만 인지기능이 살아있다면 육체 관점에선 죽었지만, 인격 관점에선 살아있는 상태다. 반대로 혼수상태처럼 인지 기능이 멈추었지만 신체는 살아있는 경우는 인격 관점에선 죽었지만 육체 관점에선 살아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처럼 특별한 사례를 예시로 들 땐, 죽음의 시점이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다.
다만 육체의 관점으로 볼 때, 육체가 온전해야 인지 기능도 동작한다. 육체가 멈추면 인지 기능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살아 있는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죽음이라는 개념은 육체가 멈추는 시점이다로 명료하게 정의된다.
7. 죽음은 나쁜 것인가
죽음은 어떻게 나쁜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살아있다면 얻을 수 있는 삶의 좋은 모든 것들을 '박탈'해 버리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하는 설명을 '박탈 이론'이라 한다. 이 이론은 죽음이 우리에게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라 말할 수 있다. 그럼 죽음은 지금 살아있는 인간에게도 나쁜 것인가.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 질문에 "죽음은 내가 살아있다면 나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이미 죽었다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쁜 것이 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 존재하지 않더라도 상대적으로 더 나쁜 박탈이 있다고 반박할 수 있다. 즉, 추가적인 삶의 기회를 죽음이 빼앗아 갔다고 보는 것이다. 이 말은 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죽음을 나쁜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즉, 비존재를 나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럼 비존재 자체가 나쁜 것일까.
비존재가 나쁜 것이라고 본다면 태어날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태어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도 죽음은 나쁜 것이라 봐야 한다. 그러나 태어나지 못해 삶의 축복을 박탈당한 것이 비극이라고 보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이 주장에 동의한다면 내가 없던 과거 또한 나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가까운 미래에 지구가 멸망하여 모든 사람이 죽게 된다면, 일찍 태어나지 못해 비존재였던 것은 나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단적인 사례가 아닌 이상 비존재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다. 과거의 비존재가 나쁘다고 볼 수 없다면, 미래의 비존재 또한 나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작가는 박탈 이론이 가장 바람직한 접근 방식이라 말한다.
8. 영원한 삶에 대해서
삶의 축복을 빼앗아 가기에 죽음이 나쁜 것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영생이 아닐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철학자 윌리엄스는 어떤 형태의 삶도 영원히 지속된다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나쁜 것으로 변하고 말 것이라 말한다. 아무리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라도 영원히 계속된다면 지겨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면 영원한 삶은 축복이 아닌 형벌이라 볼 수 있다.
그럼 기억상실과 같은 방법으로 일정 기간마다 기억을 초기화시켜 지겹지 않게 하면 어떨까. 그러면 아까 전의 '나'라는 존재와 동일한 사람이 아닌 '비슷한'사람일 뿐이다. 영생에 있어서는 지금의 나와 충분히 비슷한 존재여야 의미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나'와 다른 존재라면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이런 영생도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9. 삶은 가치가 있는가
죽음은 삶의 축복을 빼앗기에 나쁘다고 말했다. 그럼 반대로, 좋은 것으로 가득한 행복한 삶이 아닌 행복하지 않은 미래만 빼앗는다면 죽음은 좋은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미래의 행복을 비교하기 위해 먼저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삶의 가치를 산출하는 방법 중 하나로 쾌락주의를 이용할 수 있다. 쾌락주의 관점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좋은 요소로 '쾌락'이 있으며, 나쁜 요소로 '고통'이 있다고는 관점이다. 그렇기에 "쾌락이야말로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유일한 것이며 고통은 그 차체로 외면할 만한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해선 '통속의 뇌' 즉, 매트릭스의 세계관처럼 사람들이 현실이 아닌, 뇌를 통해서만 쾌락을 느끼는 상태라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아니다'라고 답한다. 통속의 뇌 상태에서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다. 아무런 성취도, 자신에 대한 인식도, 사랑하는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이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선 진정한 가치를 담고 있는 성취와 지식 그리고 인간관계가 필요하다. 즉, '내적인' 경험뿐만이 아니라 '외적인' 경험도 필요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는 소위 삶의 '내용물'을 모두 더한 합계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삶을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을 채워 넣을 수 있는 '그릇'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그릇이론이라 한다. 이 그릇 이론에는 4가지 버전이 있다.
[그릇이론 버전]
1) 환상적 - 삶은 '항상' 좋은 것이다. 영생도 좋다. 죽음은 '항상' 나쁘다.
2) 온건적 - 살아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내용물에 따라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3) 중립적 - 삶의 가치는 '0'에서 시작한다. 어떻게 채우냐에 따라 점수가 달라진다.
4) 비관적 - 남겨진 미래는 가치가 없으며 죽음보다도 더 나쁜 기간이다.
작가의 관점은 중립적 그릇 이론에 가깝다고 한다. 만약 '중립적'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미래가 중요하다. 만약 미래에 채우게 될 내용물이 긍정적인 가치가 있다면 '지금' 죽는 것은 나쁜 일이다. 반면 그 내용물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면, 지금 죽는 편이 좋은 일이 될 수 있다.
10. 죽음의 중압감
1) 반드시 죽는다. -필연성
2) 얼마나 살지 모른다. - 가변성
3) 언제 죽을지 모른다. - 예측불가능성
4)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 죽음의 편재성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나 혼자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조그마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다음, 죽음의 가변성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 평균수명 이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보다 평균수명 이하의 사람들이 받는 슬픔이 더 크다고 예상할 수 있다. 이는 죽음을 더 나쁘게 만든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나마 남았는지 모르기에 더 소중히 여기고 가치 있게 하는 것 일 수도 있다.
이렇게 죽음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닌 여러 가지 상호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먼저 '긍정적' 상호효과는 한정된 삶은 우리의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든다. '부정적' 상호효과는 삶이라는 달콤한 음식을 아주 짧게 느끼고 빼앗긴다고 느껴지게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인간은 시체로 끝나고 만다는 '비극적인' 상호효과가 있다.
이 세 가지 상호효과 중 작가는 "삶은 아름다울 수 있다'라고 보는 낙관주의 편에 서 있다. 삶이 끝나고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삶이 주는 축복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태어난 것이 좋은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11. 죽음을 마주하는 방법
우리는 죽음에 대해 세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 '부정', '인정', '무시' 다. 먼저 '부정'은 말이 안 되니 넘어간다. 우리가 늘 죽음을 '인정' 하고 살아야 하는 건 잘못이라 본다. 그러나 죽음을 '무시'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그럼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일까.
1) 두려움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합리적인' 태도인 것일까. 두려움이 적절한 감정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a. 두려움의 대상은 나쁜 것이어야 한다.
b. 그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야 한다.
c. 그 일이 벌어질 거라고 확신할 수 없어야 한다.
앞선 박탈이론에 따라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a번 조건은 맞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죽음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c번도 틀렸다.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기에 죽음은 두려워할 존재가 아니다.
2) 분노 - 그럼 분노나 짜증과 같은 감정이 정당한 반응일까. 분노란 부당한 처사를 당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기대보다 죽음이 '너무 일찍' 온다면 분노가 차오를 수 있다. 그러나 '신'이라는 존재가 있더라도 우리에게 오랜 삶을 주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리고 '우주'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우리의 수명을 통제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렇게 우리는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특정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적절치 않다.
3) 슬픔 - 좋은 것을 더 많이 누릴 수 없다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 누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운이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4) 감사 - 우리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감정은 두려움도 분노도 아니다. 대신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12.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감사한 마음을 가진채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먼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삶의 전략 방식에 알아보자.
[삶의 전략]
첫 번째 전략 - 음식, 술, 유흥으로 채워진 오늘만 사는 인생을 산다.
두 번째 전략 -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인생을 산다.
세 번째 전략 - 앞선 두 가지 목표를 적절히 혼합한다.
첫 번째 전략은 쉽고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목표이다. 반면 두 번째 전략은 성공 가능성이 낮고 높은 성취를 채울 수 있는 목표다. 둘 중에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는 삶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다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무조건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다면, 대부분 두 번째 전략을 선택할 것이라 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세 번째 전략을 이용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일단 어떤 전략을 선택하느냐에 앞서 "더 많이 채우는 인생이 가치가 더 높은 것이냐"라는 것을 따져봐야 한다.
삶의 가치는 행복과 수명으로 이뤄지는 함수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행복 X 수명 = 삶의 가치'인 것이다. 그럼 수명이 3만 년이라고 생각해 보자. 다만 살면서 느끼는 행복의 점수는 1점이다. 그러면 이 인생은 삶의 가치 점수가 30,000점 일 것이다. 다른 사례로 100년 동안 100점을 산 인생이 있다 해보자. 이 인생은 점수가 10,000점일 것이다. 3만 년을 산 인생이 2만점 더 많다. 그러나 이런 총점과 별개로 사람들은 3만년을 사는 인생보다 100년이지만 100점을 사는 인생을 선호할 것이다. 즉, 삶을 평가하는 과정은 양보다 질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그럼 삶의 질을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
사람은 놀라운 업적을 이룩했을 때 일종의 영생의 느낌을 얻는다. 이런 것을 '유사 영생'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유사 영생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자녀를 통해 자신의 DNA가 이어지도록 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자신이 이룬 '성취'가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도록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유형에 대한 작가의 입장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유사 영생의 진정한 가치는 사후에 계속해서 존재할 의미 있는 성취를 일궈낸 삶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오랫동안 남게 될 뭔가를 남기고 간다면 더욱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이다.
13. 자살
이렇게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이와 반대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선택은 올바른 것일까. 이 자살에 대해선 '합리성', '도덕성' 두 가지 개념으로 구분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합리성'면에서 보기 위해 쾌락주의 관점으로 생각해 보자. 쾌락주의 관점으로 보면 미래에 있을 내용물이 나빠 인생의 가치가 마이너스가 나온다면, 죽는게 더 낫다고 볼 수도 있다. 즉, 다가올 상황이 극단적으로 나쁘다면, 자살은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죽는 편이 낫다고 '확신'하는 자신의 생각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평소의 이성대로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상황인데도 심신미약 상태로 인해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특정상황에서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상태라면 이론적으로 자살은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다음으로 '도덕성'면에서 생각해보자. 기본적으로 자살은 '비도덕적' 행동으로 인식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네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신학적 이론' - 자살은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뜻을 우리가 알 방법이 없기 때문에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이라 말할 수 없다.
2) '감사' - 우리는 삶이라는 선물을 받았기에 그 선물을 간직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 감사를 해야 하는지 불분명하며, 내가 받은 선물이 쓰레기라면 감사할 필요가 없다.
3) '공리주의' - 일반적으로 자살을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에 나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가 자살을 통해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황 등에 처해 있다면 주변사람들도 자살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4) '의무론' - 자살은 곧 '자신'을 '살해'한다는 말이다.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을 위해 대신 희생하여 목숨을 바치는 경우는 자살이라 보기 어렵다. 이런 경우는 당사자가 자신에게 닥칠 일에 '동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 동의한 상태라면 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의무론의 금기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이렇게 합리성, 도덕성면 두 가지 개념으로 구분하여 생각해 보았을 때,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 심사숙고했고, 타당한 이유를 갖고 있으며, 충분한 정보와 조언을 얻었고,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면 적절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세 줄 요약
1. 영혼의 존재는 불명확하다. 물리주의 관점으로 보면 죽음은 육체적 죽음일 뿐이다.
2. 죽음은 나쁘거나 두려워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다.
3.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자.
주요 내용
제대로 조율된 악기가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제대로 조율된 육체가 훌륭한 영혼을 만들어낸다.
죽음은 나의 끝이자 내 인격의 끝이다. 이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끝이다.
최고의 삶이란 자신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오래 사는 삶이다.
우리의 삶이 짧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추구할 만한 가치 있는 목표가 매우 '많이' 있고 그런 목표들을 달성하는 게 힘들고 어렵기 때문이다.
후기
전반적으로 내용이 어렵지 않았고 그림 등의 이해를 돕는 자료가 많이 있어 잘 읽을 수 있었다. 물리주의자 입장으로 죽음을 바라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나도 물리주의자 가깝기 때문에 저자의 생각에 전반적으로 공감하면서 읽었다. 다만 종교를 믿거나 사후세계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독자라면 이렇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
이 책은 가설이나 철학들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서 많이 배울 수 있던 책인 것 같다. 다만, 영생이 왜 안 좋은가에 대해서는 논리가 약하다고 보였다. 내가 내용 이해를 잘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를 설득하진 못한 것 같다.
시시포스처럼 의미 없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동을 하는 인생을 영원히 살아야 한다면 영생은 형벌이 될 수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결국 지겨워진다는 논리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지금이 농경시대라면 이해될지 모르지만 현재 유튜브에 하루 동안만 업로드되는 영상의 길이만 2년이 넘는다고 들었다. 그 모든 영상이 재미있다고 볼 수 없지만. 그만큼 새로운 영상들이 올라오고 있다. 유튜브만 보는 생활만 해도 지겨울 새가 없다고 본다.
지금의 나의 모습과 완전히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영생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가 어릴 때 모습과 비교하여 모습과 생각이 바뀌었어도 지금의 '나'가 이전의 '나'와 동일한 이유는 기억의 연속성과 그런 기억들의 조합으로 지금의 인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책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미래의 내가 지금과 많이 달라도 결국 '나'라는 존재는 이어지기에 의미가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생각한다.
작가의 입장에선 영생을 부정적으로 보지 못하면 죽음은 두려운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러면 뒤에 나오는 논제들을 이끌어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영생은 좋지 않다고 말한 것이라 보였다. 이 보다는 영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게 낫지 않았을까.
영생뿐만 아니라 통속의 뇌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가 작가의 주변인들이 쾌락주의를 옹호하지 않기 때문에라는 근거는 너무 부실하다고 생각된다. 쾌락주의자인 나의 입장에서 이야기해보자면. 인간을 육체로 보는 관점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관은 뇌다. 칸트의 관념론에 따르면, 우리는 외부에서 오는 자극을 뇌에서 조합한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결국 통속의 뇌나 현실의 뇌나 동작 과정은 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통속의 뇌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면 그때부터 행복하지 않을 수 있지만, 죽기 전까지도 그 사실을 모르고 삶을 마감한다면, 그 또한 쾌락주의자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삶이라 생각한다.
죽음이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언젠가는 다가올 죽음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봐야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관한 내용 정리를 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지만 이 번에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뜻깊었다.
추천
죽기 직전엔 꼭 한 번 읽어보길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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